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.21 사태 (문단 편집) == 사건의 직접적인 여파 == 위의 결말에서 대부분의 중요한 이야기는 나왔지만 그 밖에 이 사건이 후세에 크게 남긴 영향이 몇가지 있다. * '''[[주민등록번호]]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.'''[* [[https://news.nate.com/view/20111128n00427|간첩식별 위한 제도가 43년간 존속…번호 자체에 개인 고유정보 다 담겨, 2011-11-28, 한국경제]]] 참고로 [[박정희]]의 주민등록 뒷번호는 100001이며 [[육영수]]는 200002다.[* 당시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6자리였다. 현재의 뒷자리는 개정을 통해 6자리에서 7자리로 개정된 것으로 뒷번호 두 번째와 세 번째 숫자는 출신 지역으로 변경된 것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. 그런 말인 즉, 박정희가 지금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을 경우 100001이 아니라 1[[경상북도|71]]0001이 되었을 것이다.] * '''[[예비군]]과 [[5분전투대기부대|5분대기조]], 그리고 [[육군3사관학교]]가 이 사건 때문에 창설되었다.''' 향토예비군은 고작 3개월여 만인 [[4월 1일]], [[육군3사관학교]]는 9개월여 만인 [[10월 15일]]에 창설됐다. 그리고 [[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]]도 이에 대비하기 위해 매년 실시하고 있다. [[유격 훈련]]이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생겨났다고 한다 * 병사 '''복무기간이 연장'''되었으며 기존 병사들의 전역일도 미뤄졌다. 당시 복무기간이 단축되고 있었는데 이 일로 현역병들은 육군과 해병대는 6개월(36개월), 해군과 공군은 3개월(39개월)씩 복무기간이 연장되었다. 당시 제대할 날짜만 세고 있던 말년병장들에게는 [[청천벽력]]과도 같은 소식이었다. 당시 병장들은 [[일반하사]]로 진급해 '''6개월을 더 복무했다'''. 복무기간뿐 아니라 이 사건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훈련 강도가 세졌고 군기가 대대적으로 확립되었다.[* 당시 [[말년병장]]이었던 사람의 회고를 들어 보면 제대 날짜 세면서 매일 개울 가서 천렵하고 낚시하는데 갑자기 간첩이 넘어왔다고 하더니 3kg짜리 모래 주머니를 발에 채우고 매일 뛰게 시켜서 지옥 같았다고 한다. 이 때 군복무 기간이 늘어나면서 피해를 봤던 병사들은 전역 후 [[김신조]]와 우연히 마주치자 "네놈 때문에 군대에서 더 고생했다" 라며 멱살을 잡고 욕을 했다고 한다...] 이때 늘어난 복무 기간은 십수년이 흐른 뒤인 [[1977년]](육군), [[1979년]](해/공군)이 되어서야 이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줄어들게 되었다(육군 33개월, 해/공군 35개월). 다만 이외에도 복무기간 연장과 [[예비군/대한민국|예비군]], [[방위병]] 제도는 주한 미 7사단 철수와 베트남 파병의 영향을 받았다. 비슷하게 1975년 [[남베트남]]이 패망한 뒤 [[민방위|민방위대]]가 창설되었다. * 경찰 차원에서 유사시 대간첩작전 등에 동원할 병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경찰청이 '''[[전투경찰순경]]'''을 창설했다. 사실 그 이전에도 전투경찰이라는 조직은 존재했다. [[6.25 전쟁]] 당시 활동한 [[전투경찰]]도 있었고, [[1962년]] [[서울경찰청|서울경찰국]]에 1개 기동중대가 창설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. 그러나 이들은 현역 입영자원을 빌려쓰는 전환복무가 아니라 경찰관들로 구성된 부대였다. 당시 평균 연령 30세였고 전투현장에 투입이 안 된 것이 아니라 경험 부족으로 인해 고전을 겪었음이 경찰 내부 교육용 자료에서 언급된다. 이 제도가 정착되어 [[대한민국 육군]]과 [[대한민국 해군]](→[[해양경찰청 의무경찰]])의 입영자원으로 구성된 [[전환복무]] 제도가 속속 나왔는데, 현실은 하루하루 [[시위]] 진압하는 부대였다.[* 물론 지금은 전투경찰순경은 물론 의무경찰 제도까지 모두 폐지되었다.] 물론 그 빈도가 없다시피 했을 뿐 의경으로 구성된 기동대와 달리 내륙전경대와 112타격대의 임무 중엔 대간첩작전이 엄연히 있었으며, 해안경계부대 역시 전경으로 구성되었다. 이 사건을 의식해서 그런지 '김신조 루트'라고 불리는 우이령길 서울 측 입구엔 [[서울경찰청]] [[제2기동단|802의경대]]가 설치되었다. * 경계의 허점을 노리기 위해 두 개 부대의 담당 구역이 맞닿는 부분을 노렸다. 이런 부분은 서로에게 떠넘기는 심리에서 허술할 것이라 판단하고 침투 지점으로 선택한 것으로 실제로 정확한 판단이었다. 이 사건 이후에는 담당 구역이 서로 겹치도록 하여 개선했다.[* 예를 들어 가, 나 부대 사이에 초소 A, B, C, D가 있으면 가 부대가 A, C초소를, 나 부대가 B, D 초소를 담당한다.] * 침투 당시 휴전선의 철책을 통과할 때 지지대 기둥이 세워진 뒤쪽은 철조망이 잘려 있어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걸 이용해 그 부분을 잘라내고 망을 걷어 올리고 들어온 뒤 다시 내려놓는 식으로 통과했다고 한다. 이로 인해 경계 시 철책을 일일이 흔들어서 확인하고 지지대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절차가 생겨났다. * 방첩대는 그해 9월 [[국군보안사령부]]로 개칭하고 조직을 개편했다. * 이 사건의 보복을 위해 창설된 4개 부대가 바로 선갑도 부대(육군), 장봉도 부대(해군), [[684부대]](공군), 마니산 까치부대(해병대). [[실미도(영화)|실미도]] 초반부에 나오는 북한 공비들과의 교전이 이 1.21 사태다. * 육군 소령으로 복무 중이었던 [[임동원]] 전 국정원장이 사건이 일어나기 석 달 전 집필한 <혁명전쟁과 대남전략>이 사건 발생 후 이북의 대남전략을 연구하는 육사, 군, 경찰, 중앙정보부 교육기관의 교재로 채택되어 유명세를 탔다. 이후 [[율곡사업]]의 실무진[* 실무진의 책임자 격이었던 [[이재전]] 장군이 쓴 회고록이 국방일보에 연재되었으니 참고 바람.]으로 발탁되는 등 승승장구했다. * 이 사건 때문에 북대문([[숙정문]])이 2006년 4월 민간에 개방될 때까지 38년간 폐쇄되었다. * [[우이령]] 도로가 폐쇄되어 군용 작전차량을 제외한 차량들은 구파발을 경유하여 빙 돌아가야 한다. 현재는 부분 개방되었지만 환경 단체의 반발로 인해 차량 통행을 할 수 없다. *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[[교련]] 실습이 실시되었다. 대학교에서는 1988년, 고등학교에서는 민주화 이후인 1993~1994년 사이[* 정확히는 군사 훈련 부분만. 과목 자체는 2011년에야 폐지되었다.]에 각각 폐지되었다. * 1970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이 사태로 인해 북한의 테러 위협에 대비한 보안 경비비용으로 막중한 금액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와 결국 개최권을 반납하였다. 그리고 [[1970 방콕 아시안 게임|태국 방콕에서 아시안게임이 연속 2회 개최되는 유례없는 결과를 낳았다.]] 물론 당시는 국내 발전에 필요한 재정이 많이 필요한 시기였으며 특히 아파트, 지하철, 고가도로 등이 활발하게 건설, 계획되었고 여기에 개최 비용과 북한의 군사도발도 많이 일어나는 편이었기에 재정 부담 등으로 개최가 어렵게 됐다. 이 사태는 서울 아시안게임 개최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.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큰 행사를 앞둘 때마다 북한은 테러 등을 자행했다.[* [[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]]을 불과 1주일 앞두고 [[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]]를 일으켰고, [[1988 서울 올림픽]] 때 [[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]]을 일으켰으며, 2002년 한일월드컵 때 [[제2연평해전]]을 일으켰다.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전쟁 중인 국가이자 안전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며 개최를 방해하는 작전을 펼쳤다.] * 여담 아닌 여담으로 당시 [[대상(기업)|(주)미원]]에서 추석 선물세트를 출시할 때 세계 각국의 우표로 포장을 꾸몄는데 그 중 11개의 공산국가 우표가 포함되어 있었다. 그 덕택에 추석 선물세트를 회수해야 했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. * 광화문 광장 앞의 충무공 [[이순신]] 동상이 이 시기에 세워졌다. 박정희 대통령이 충무공을 존경했으며 호국정신을 강조하기 위한 방책으로 세운 것이다. * [[서울특별시청]]이 뜬금없이 [[경상북도]] [[청도군]] [[화양읍]] 범곡리(당시 화양면 범곡동) 청도군청 북쪽에 문서고를 두었던 것도 이 사건의 여파다. 1971년에 청도문서고를 만들었으며, 2019년 5월 15일 [[은평구]] [[녹번동]] 서울혁신파크에 개원한 서울기록원으로 문서들을 모두 이전할 때까지 이용했다. 자연히 [[서울특별시청]] 산하 기관들 중에서는 시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